정말 가끔씩 다시 봐야할 것 같은 책이었다.
읽는 내내, 공감하고 뭔가 아프고, 짠한… 내용은 그런게 아닌데…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일 수 있다는 오래된 명제는 자기 존재 증명의 영역에서 더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다. 병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말이다.
노모의 죽음 이야기나 은퇴 후 우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우울이라는 내 삶의 파도에 리듬을 맞춰 나도 함께 파도에 올라타야할 타이밍이다.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구석구석 비춰주는 거울처럼,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나를 담고 있는 누드 사진처럼 ‘거부감 들지 않고 다정하게, 그러나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공감 유발자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하고 이해해야 공감을 할 수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습관이다.
외형적 성과나 성취 자체에 대한 과도한 방점은 사람에게 성과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가져오지만 존재 자체에 대한 집중은 안정과 평화를 준다. 부작용이 없다.
누군의 행동과 생각이 그의 마음과는 별개하는 사실만 알아도 마음껏 공감할 수 있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 불안을 느낀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할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왜 그런 걸까?’ 곰곰이 나와 내 상황을 짚어봐야 한다.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그것이 공감적 태도다.
부모인 내가 자식을 사랑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야 사랑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 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정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